새벽에 눈을 뜨면 마음이 맑아지는 날이 많기를! 어제, 오늘처럼 그럴 수 있기를 기도한다. 오늘처럼 그럴 수 있기를 기도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루하루를 더 온유하고 성실하게 살아야 하리라. 천천히 새 옷을 갈아입는 사철나무처럼 푸르게!
손님맞이를 할 때는 자신의 시간이 축나고, 하려던 일이 더러 밀려나기도 하지만 이 때문에 끌탕을 하거나 초조해지기보다는 마음을 평온히 갖는게 좋다 시간을 빼앗긴다기보다는 오늘을 함께사는 사람으로서 사랑을 나누는 순간이라고 생각하고 시간을 쓰면 마음 안에 조용히 피어나는 기쁨이라는 꽃.
비가 쏟아질 것 같은 회색빛 날. 밤이 모르는 아주 조그만 슬픔 한 방울 있었는데, 기도하고 나니 어느새 수증기로 증발해버렸네. 혼자만의 사소한 슬픔에 빠져 있기엔 무겁고 힘든 일이 너무 많은 세상에 살고 있음을 명심하자.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라던 윤동주 시인의 말도 자주 기억되는 요즘, 나는 그나마 시도 쓰지 못하니 더욱 부끄럽다. 그러나 내가 희망을 지니고 살아야 남에게도 작은 빛이나마 전할 수 있는 것이겠지.
우리 모두는 너무 바쁘게 살고 있다. 기쁜 일이 있으면 그 기쁨에 푹 잠길 수가 없고, 슬픈 일이 있어요 그 슬픔 안으로 깊이 잠길 수가 없이 숨파게 살고 있다. 지인들의 죽음을 접하고서도 좀더 진지하게 오래오래 애도할 여유가 없는 안타까움. “죽음이 다른 사람의 문제일 때 그것이 비록 고통스럽고 무서운것이라 할지라도하나의 소식일 뿐이다”라는 [빛과 어둠의 순간들]의 저자 세실리아 벤트라 수녀의 말이 다시 떠오른다.
왜 그럴까. 우리는/자기의 아픈 이야기. 슬픈 이야기는 그리고 쉽게 늘어놓 으면서/다른 이의 아픈 이야기, 슬픈 이야기엔 별로 귀기울이지 않네, 아니 아예 듣기를 싫어하네/해야 할 일 뒤로 미루고 하고 싶은 것만 골라서 하고/자기 기분에 따라 일의 우선 순위를 잘도 바꾸면서/늘 ‘시간 없다’고 성화시네/저 세상으로 떠나기 전 한 가닥의 미소를 그리워하며/건강하지만 인색한 사람들/늘 말로만 그럴듯하게 살아 있는 자비심 없는 사람들/그 모습 속엔 분명 내 모습도 들어 있음을 나는 알고 있지/정말 왜 그럴까/왜 조금 더 자신을 내어놓지 못하고/그 토록 이기적일까, 우리는-. 어느날 병원에서 환자들을 만나고 나서 문득 떠올랐던 나의 생각들.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오, 나의 기쁨이여….” 하고 인사했다는 어느 성인의 전기를 읽고 눈물이 핑 돌았다. 마더 테레사의 [모든 것이 기도에서 시작된다] 는 책을 번역하다 내 마음을 적신 한 구절. 캘러타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어떤 사람에게 마더 테레사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하는 일과 내가 하는 일은 서로를 보완시켜주는군요. 당신은 연주하는 행위로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우리는 봉사로 그렇게 하지요. 당신이 춤추고 노래하는 것이나 우리가 병자들을 씻기는 행위는 결국 같으 것인 셈이지요. 우리는 이 세상을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바람 많이 불던 날. 작년 5월에 문을 연 급식소에 가서 노숙자, 실직자, 독거 노인들께 점심 대접. 180명의 각기 다른 모습들을 찬찬히 볼 겨를도 없이 바삐 지내다 온다. “아침도 굶었으니 밥을 아주 많이많이 주세요”하고 외치는 초췌한 차림의 내 이웃을 보는 일은 마음 아프다. “정작 고픈 것은 이 육신의 배가 아니란 말이여, 쓰라린 이내 가슴을 그 누가 알꼬!”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어느 술 취한 노숙자의 모습도 잊혀지지 않는다. 질서를 이유로 어쩌다 잔소리를 할라치면 “수녀들은 애를 안 낳아 속이 좁다”고 호통치는 이들에게도 우리는 어진 눈길과 미소를 잃지 않아야 하리라
넘어져 뼈를 다쳐 큰 수술을 하고 입원중인 선배 수녀님을 몇 차례 간병하며 느낀 게 많았다. 직접 심부름시킬 때까지 수동적으로 기다리지 말고 환자의 입장이 되어 계속 연구해서 이것저것 물어가며 돌보는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는 것. 대소변을 받아낼 땐 너무 미안해하지 않도록 이쪽에서 명랑한 표정으로 말을 많이 하는 것이 너무 잠잠한 것보다는 낫다는 것. 기술적인 면도 필요하지만 더 중요 한 것은 환자를 편안하게 해주려는 인간적인 따스함과 정성스런 마음임을 내가 직접 실습하면서 느끼고 배울 수 있어 더 없이 기쁘고 고마웠다.
부활절을 지내고 두 명씩 짝지어 ‘길위의 예수님’을 만나 현장 체험.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그날의 간단한 점심과 약간의 차비. 어떤 이들은 자갈치
시장에서, 어떤 이들은 병원과 장애인 시설에서 각자 할 수 있는 봉사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산에서 새점 치는 아저씨의 인생 이야기 듣는 일부터 했다고 한다. 제 몫의 점심을 노인들에게 양보하고 굶고 돌아온 이들도 있었다. 나는 아미동 까치고개의 전신마비 장애인 이동기씨를 방문. 30년을 누워 살면서도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는 아저씨의 지붕 밑 작은 방에서 시도 함께 읽으면서 웃음 꽃을 피웠던 시간들. 돌아오는 길엔 모란꽃 , 라일락 꽃 향기가 길에도 마음에도 가득했다.
사랑은, 특히 이웃 사랑은 관념이나 추상이 아니라 행동이고 실천이라는 것을 자주 들어왔지만 정말 그러하다는 것을 살아갈수록 절감한다. 사소한 것 하나라 도 실천하는 것이 수백 번의 좋은 말보다 낫다. “어둡다고 불평하는 것보다는 촛불 한 개라도 켜는 것이 더 낫다”는 중국 격언도 자주 묵상하는 요즘이다. 좋은 일에도 늘 궁리만 많고 실천이 더딜 때, 시간 없어 못 하겠다고 푸념하고 싶을 땐 나 스스로에게 이렇게 일러주고 싶다. “지금 할 수 있는 것부터 먼저 하지 그래. 그리하면 사랑으 지혜도 생긴다는 믿음을 갖고….”
어쩌다 수첩을 들여다보면 이미 이 세상을 떠난 이들의 이름도 발견하고 잠시 비애에 잠긴다. 죽은 이의 이름들이야 지우면 되지만 정리를 한답시고 그 많은 이름들을 그리 쉽게 지울 수 있는 걸까? 누가 나를 좀 번거롭게 한다 한들 그 이름을 지우는 일은 왠지 미안하다. 꽃밭의 꽃들이 다 나름대로의 모양과 빛깔과 향기를 지니고, 다 사랑을 필요로 하는데 “너 싫어, 너는 빠져”라고 말하면 좀 서운해 할 것 같다. 연말이 되면 하나하나 수첩의 이름들을 지우며 정리한다는 어느 수도자의 글을 읽고 나도 그리 해보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때로 힘겹게 여겨지더라도 모든 이를 진정 사랑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넉넉함을 지녀야만 내 마음에도 한 송이의 향기로운 꽃이 피어나리라고 다시 생각해보는 봄. 봄이 왔다고 해서 자연의 꽃향기에만 취하지 말고 사람들이 뿜어내는 삶의 향기도 맡을 수 있기를! 더구나 그들이 아픔 속에 뿜어내는 짙은 향기를 내 탓으로 외면하지 말기를!
사소한 것도 크게 슬퍼하고 제각기 고민이 많은 나의 십대 친구들에게 여러 통의 편지를 썼다. 꽃이름 부르듯이 이름 한번 불러주고, “희망을 지니고 살아야 한다”고 짧은 격려의 말 한마디 건네주는 것만을도 매우 기뻐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그들은 내가 항상 첫 자리에 두고 싶은 고운 ‘봄 손님’, ‘꽃 손님’들이다.
수녀 이해인